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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과 이성산성 일대의 역사성 연구(1)

기사승인 2019.06.15  19:3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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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종섭<백제문화연구 회장/ 신지식인>

 하나의 산줄기로 연계된 남한산성과 이성산성 그리고 주변일대의 유적과 함께 종합적인 연구 검토를 하지 않으면 전채적인 역사성을 이해 할수 없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오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구의 필요성은 남한산성에서부터 이성산성, 몽촌, 풍납,에 이르기 까지 모두가 백제의 건국과 관련된 곳으로 지적되어 왔었던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별개의 유적으로 다뤄웠던 것으로 단편적인 문헌 기록은 많으나 전채를 이해하고 연관된 유적을 연구 조사하는 것에는 미흡 했었던 관계로 근본 적인 연구가 되지 못하여 한강권 백제 건국과 같은 거대한 실체를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관념으로는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의 성으로만 부각되었으며 이성산성은 신라시대 몽촌, 풍납토성은 백제 의 도읍지로 보았던 견해가 지배적이 였던 것이다.

남한산성 이성산성 몽촌 풍납등 모두 6km 범위 내의 거리 임에도 분리하였을 만큼 안목을 좁게 보았던 것에서 이해를 달리 하였던 것이다.

같은 문화권에서 서로 보완성이 있는 인근지역임에도 연계된 것으로 보는 것보다 지금까지 제각각 분리하여 생각하므로서 한정된 틀을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으로 단편적인 각도에서 보았던 결과 에서 백제 건국과 같은 실체를 밝히는데 장해가 되었던 것이다.

최근 남한산성 발굴에서도 다량의 백제 시대 유물이 출토 되므로서 백제시대부터 쌓았던 성으로 규명이 된 것이다.

우선 오랫동안 발굴이 진행 되면서 많은 것이 밝혀진 이성산성의 특성을 심층적으로 검토해 가면서 남한산성 과 주변일대와 연계성 연구를 확대해 간다면 한강 본류에 대한 고대사의 근원을 쉽게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순서로 전계 한다면 전체의 흐름을 알수 있다는 것이다.

그중에서 다양한 유적과 특수성이 있는 이성산성은 위치적으로 남한산성과 몽촌 풍납으로 이어 주는 한강변 연계지점 으로서 지금까지 17년 동안 10차에 걸처 발굴 하였던 성이며 이렇게 오랫동안 발굴한 성은 드문 것으로 그 동안 많은 의문이 제기 되여 왔었던 성이다.

조선시대는 백제의 초기 도읍지로 거론되어 왔으며 초기 발굴에서는 신라 또는 고구려 등으로 변동이 있었고 최근 발굴에서는 백제 시대의 성이라는 견해를 주장하고 있는 만큼 논란이 많은 유적이다.

그러나 누구나 이해 할 수 있을 만큼 명확하게 고구려나 신라의 유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으며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거론 해야 될 것은 이성산성의 입지 조건과 주변 유적들과의 종합적인 연계성이며 지금까지 발굴된 유적과 유물에 대한 총채적인 검토와 함께 보완 관계등을 살펴 보는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떤 유적이든 주변과의 연계성이 있으며 특히 이성산성과 같이 유적과 유물에서 보면 다른 지역과 다르게 나타나는 특수성이 있다는 점에서 비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성들과 다른 면은 무엇이며 지형적으로는 어떤 특성이 있는 유적인가를 살펴보면 고대전에서 요충지로서는 한강권 그 어느곳 보다 입지 조건이 뛰어난 남한산성이 이성산성 남쪽에 있으며 최근에 발굴된 목조 단일 건물지 로서는 최대 규모에 속하는 교산동 건물지가 동쪽 가까운 곳에 있다.

서쪽으로는 몽촌 풍납의 토성 들이 강건너 아차산성과 함께 한강변을 지키고 있는 구조이다.

<교산동 전경>

안목만 있다면 이성산성이나 교산동 건물지 등 주변 유적에 대한 성격을 규명 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만큼 대규묘 유적이 발굴되여 많은 진전이 이루워진 상황이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유적이나 유물에 대해서 진위 여부를 구별하기 어렵거나 상태가 좋지 않은 정확성이 없는 것은 논의 대상이 될수 없기에 제외 했으며 이는 혼란을 초래 하지 않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본다면 이성산성에서 거론 될 수 있는 것은 특수성이 있는 성벽과 저수지 다각형 건물지 와 신앙유적 이며 유물로서는 판독이 가능한 명문인 무진년 목간(木簡), 자로서는 당척(唐尺) 이다 보다 특성이 있는 코끼리 발 벼루 가 출토되었으며 토기로서는 그 어느 곳 보다 많이 출토되고 있는 인문(印文)이 있는 토기가 많은 비율로서 구분하는데 어렵지 않은 것으로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위의 몇 가지 이외는 누구나 구분하고 공감하는데 문제가 되기에 본질 자체가 뚜렷한 유적과 유물만이 논제로 선택 할 수밖에 없기에 아래의 7개를 중점적으로 선택하였다.

【1】 이성산성과 성벽의 돌 【2】 저수지 【3】 8. 9. 12각 건물지 및 신앙유적(거북바위 이외 다수) 【4】 다량의 인문 토기 【5】 무진년(戊辰年) 목간(木簡) 【6】 코끼리발 벼루 【7】 당척(唐尺)의 자

위의 문화재는 나타나는 현상이 뚜렷 하고 특수성이 있으므로 성격을 밝히는데 좋은 자료가 되므로서 선택하게된 것이며 잘알려진 유적 유물 들이다.

상기 이외 토기나 와편이 많지만 뚜렷하게 시대별로 구분 할 수 있는 기준이 미흡하고 또한 어느시대 는 어떤토기 와 어떤 와편만이 사용했었다는 정확한 구분을 할수 없는 유물을 쉽게 단정 해서도 안되며 또한 면밀하게 여러 각도로 검토하지 않는다면 역사 왜곡에 큰 원인이 될 것이다.

일반적인 유물이 출토되었다 하여도 한강권 에는 삼국의 각축장이 되었던 만큼 혼재 될 가능성은 충분한 곳이다.

또한 하남시에는 백제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삼족토기는 미사리 발굴을 비롯한 한강권 일대에서 폭 넓게 삼족 토기가 발견 되였으며 이는 백제인 들이 폭넓게 살고 있었다는 증거 이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보다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사람이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중요한 곳에는 완품의 토기가 쉽게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이러한 완품의 유물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어떤 경우에 해당될까 생각 한다면 침수나 화재 등으로 갑자기 매몰 되었던 곳에 사람의 발길이 오랫동안 가지 않았던 곳이거나 또는 무덤의 부장품에 해당 될 것이다.

풍납 토성과 같이 침수 매몰이 잘되는 곳에는 완품의 유물이 많이 출토 될 수 있는 곳으로 발굴에 의해서도 많은 유물이 출토 되었던 곳이다.

그러나 사람이 살기 좋은 중요한 위치 쉽게 말하면 지속적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안정된 지형의 도시에는 완품의 유물 보다 파편이 많을 것이며 시대에 따라 중복 되어 교란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의 왕도는 이에 걸맞는 거대한 유구가 남아 있어야 만이 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면으로도 하남시에는 거대한 고대 도시 구조가 나타나면서 유물 파편의 퇴적도가 높다는 것이다.

고대의 유적 발굴에서 특정 유물만이 전부라고 생각 해서도 않되며 특히 백제 초기에 대해서는 미지의 학문이라는 것이며 최소한의 발굴로 많은 것을 알아 내는 것으로 유적을 적게 파괴 하고 많은 수확을 거두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야 하는 것이 기본으로서 많은 발굴 면적을 남겨서 후손에게 넘겨 주어야 만이 인정받는 지식인이 될 것이다.

완품의 유물은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기에 무엇보다 중요시 되는 것은 고대의 왕도는 몇 개의 성(城)이나 몇 개의 건물지 만으로 이루워진 것이 아니라 왕도로서 갖추어야할 많은 시설이 발견되어야 하며 이에 걸맞는 복잡한 도시구조의 유적이 동반되여야 만이 백제의 500년 왕도라고 할 수 있다.

즉 단순한 구조가 아니며 주변 전채의 유적 배치등 연계성 연구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광주신문 gjilbo20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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