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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과 이성산성 일대의 역사성 연구(7)

기사승인 2020.03.25  19:4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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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남 교산동 건물지를 왜 백제의 왕궁지로 보는가?(6)

<왕궁지 출토 유물, 기와>

【4】 다량의 인문 토기

[가] 연질 토기의 분포 상황

우선 판단하기 쉽고 누구나 이해 할 수 있는 기초적인 것부터 살펴보면, 오랫동안 하남시 일대를 지표 조사한 결과 에서 전채적인 유물 출토 상황 등을 다른 지역과 비교해 본다면 보다 폭넓게 기본적인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유물중에서 쉽게 구분되는 기초적인 유물에서 하남시 일대를 살펴보면 어떤 역사성이 있는가를 큰 뜻에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구분 할 수 있는 갱질 토기과 연질 토기 에서 연질 토기의 분포 면적이 넓은 것으로 조사 되었으며 지금의 하남시 전 지역 교란이 되지 않은 곳에서 폭넓게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지표조사에서 나타나는 연질 토기와 갱질 토기는 문외한이라도 누구나 구분 할 수 있으며, 또한 갱질 토기는 획기적인 기술의 발달이기에 일정한 생필품에는 파급효과가 큰 것으로 사용 변화의 속도가 빠른 것이다.

다만 열을 받는 토기는 연질이어야 만이 쉽게 균열되지 않기에 지금도 약탕기나 시루는 갱도가 낮게 제작되고 있는 것이다.

“3세기말 굴가마(登窯)가 개발되어 1000도 이상으로 굽는 것이 가능해지고 밀폐된 공간에서 외부 산소 공급이 차단 되어 회청색 갱질 토기가 만들어 지게된다,,

“4세기 이후 부터는 연질 토기가 현저히 줄어들고 갱질 토기가 본격적으로 제작된다,,

“삼국시대의 토기는 연질 토기도 있으나 대부분 갱질 토기가 많은 것이다,,

“백제 토기의 여러 기종이 “대략 대부분이 4세기 중엽을 분기점으로 회청색 갱질화 되고 있다,,

(백제의 고도 부여 279쪽)

“삼국시대부터 유약을 입힌 토기가 발달하였다” (한국의 도자기 62쪽 정양모)

“고구려에서는 초기와 중기에는 연질이며 후기에는 갱질이다”(조선기술 발전사 144쪽 북한 사회 과학원)

“백제 도기들은 초기에는 연질 도기들 이지만 후기에는 경질 도기들과 자기들 그리고 유약 바른 질그릇들이 출현한 것은 소성과 재질이 훨씬 개선 되었다” (위의 책 153쪽)

 

북한에서는 토기를 도기라 하는 것 이외는 고구려 초기에는 연질 토기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같은 것이다.

위의 내용은 지금까지 밝혀진 연질 토기와 갱질 토기에 대한 시대 구분이며 남북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 로서 위의 내용을 인용하면 하남시 교산동 건물지에서는 4세기 이전에 성행하였던 연질 토기가 많은 양의 비율로 산재되었고 전 지역의 지표조사에서도 밀도높게 발견되고 있으며 이는 유적의 사용 연대를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우선 유적을 찾아내기 위한 지표조사에서 기초적인 유물에 대한 판독을 하지 못하면 유적을 찾아 낼 수 없는 것이며, 삼국초기에 해당되는 토기편이 그 어느 곳보다 하남시 지역에서 많이 발견됨으로서 백제 초기와 관련된 유적이라는 것을 알게되어 보다 심층적으로 조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성산성 역시 연질 토기가 많이 발견되고 있는 곳으로 1987년도 이성산 발굴 조사 보고서(71쪽) 에 의하면 “표토층에는 고려, 통일신라 토기편이 출토되고 아래로 내려 갈수록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연질 토기 수가 많아지며 초석(礎石)이 노출된 지표하 50~60cm 지점에서는 회백색의 연질(軟質) 토기편들이 다량으로 출토 되었다.

 

위와 같은 내용은 거론 하고자 하는 지역에 대한 유물층을 잘 표현하고 있는 발굴조사로서 이성산성 건물지 아래층에는 삼국시대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는 것이며, 유물의 내용에서 회백색 연질 토기는 백제가 한강권을 500년 동안 통치할 시기의 4세기 이전의 연질 토기로 흔히들 말하는 신라 고구려와는 혼돈이 되지 않는 시대이다.

특히 회백색 연질 토기는 삼국 초기로서 백제초기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는 내용과 같은 것이다.

1995년 세종대에서 교산동 건물지를 조사할 때 목격한 것은 지표에서 80cm 아래의 적심석 판축 속에서 연질의 회백색 회흑색 등 흑도의 토기편이 깔려 있어 백제 초기부터 이곳에 도읍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남시 교산동일대 문화 유적 37쪽 참조 세종 연구원 발행)

삼국 초기에는 연질토기에서 4세기경에는 갱질 토기로 발전하였고, 또한 유약 입힌 도기로 발전 할 만큼 삼국 말기에는 연질 토기 시대는 벗어난 것이다.

연질 토기에서 갱질 토기 의 발명은 현대의 자동차나 컴퓨터보다 더 획기적인 발명 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연질은 흡수성이 있어 물이 베어 나는 용기로서 쉽게 파손되는 결점과 흙이 음식물에 묻어나는 사용상의 어려움이 있으며, 또한 필수적인 생활품으로서 갱질 토기의 보급은 빠른 속도로 이용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남시 전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많은 연질 토기들이 한성 백제시대의 토기로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교산동 건물지의 하층에는 회백색 연질의 토기편이 대부분이며 공주로 천도할 무렵인 5세기 말에는 쇠소리가 나는 갱질의 토기를 제작했으며, 신라 고구려 가야 등에도 이 무렵에는 갱질 토기로서 하남시 주변에서 출토되는 연질의 토기편은 특수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백제초기의 유물이 많다는 것이다.

갱질의 그릇이 개발되었는데 잘 부셔져 운반이 어렵고 흡수율이 높아 물이세고 흙이 묻어나는 그릇을 오랫 동안 병용 할 수는 없는 것이며, 편리함의 차이가 너무 크기에 빠른 속도로 파급 되었던 것이다.

 

[나] 출토 기와의 현황

 

지금까지 시대 구분이 어려운 것도 기와 이며 전체적으로 많은 양의 붉은 기와가 출토 된다면 삼국시대로 보는 것은 초기에 같은 문화권에 속하였던 고구려의 유적과 비교해 보면 북한에서는 흔한 용어로 “고구려의 붉은 기와,, 로 호칭할 만큼 붉은 기와를 삼국시대로 보는 것이다.

“고구려때의 기와는 대부분 붉은 기와였으며 재색 및 회청색 기와는 고구려 후기부터 제작되기 시작 하였다,, (조선 기술 발전사 157쪽)

위와 함께 “4세기말 5세기초에 건설된 안학궁의 기와는 대다수가 회청색 기와였으며 동명왕릉과 정릉사터에서 나온 기와는 붉은 기와 이다,,(위의 책 156쪽)

고구려 초기의 국내성 주변 유적에서는 붉은 기와가 많다는(조선 중세 건축 유적 연구 27쪽 북한 사회과학원 출판)것으로 초기에는 고구려와 백제는 같은 문화권으로서 하남시의 교산동 건물지와 이성산성에도 많은 양의 붉은 기와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백제 초기의 유물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공주나 부여보다 붉은색의 선문 격자문 등 고식 기와가 많다는 것이며, 흡수성이 많은 붉은 기와는 검은색 보다 기술이 발달 하기 전의 것으로 쉽게 구분되는 것이다.

검은색 기와는 가마에서 연기를 배출시키지 않고 기와 속에 스며들게 한 환원염(還元焰)법으로 탄소를 유입시킨 흡수성이 낮은 기와를 제작하는 소성법이며 지금까지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소수의 붉은 기와는 후대에 까지 섞여 나올 수 있으나 많은 양의 붉은 와편이 집단적으로 출토 된다면 삼국초기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뜻에서도 교산동 건물지나 이성산성은 시대적으로 공주 부여 보다 붉은 기와가 많은 것은 한강권 백제 통치 시대로 올라가는 와편의 유물이 많다는 것이다.

고대의 기와는 왕궁이나 관부, 신앙적인 사찰 등에서만 사용하는 것으로 이성산성과 교산동 유적에는 많은 와편이 출토 되었으나 불교가 왕성 할 때 나타나는 연화문 막세 기와는 전체 와편의 양에 비하면 극소수가 발견되었을 뿐, 막세 기와는 드물고 불교와 관련된 뚜렷한 유적은 이성산성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막세 기와 사용이나 불교가 성행하기 전의 신앙 유적과 유물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백제 한성 시대의 유적이 많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전재하는 것은 단편적으로 보는 것 보다 전채의 유물과 관련 지역 전체를 폭넓게 이해함으로서 지역적인 세력 기반을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성산성이나 교산동 유적 등을 조선시대, 신라, 또는 고구려, 통일 신라, 시대 등으로 단정하여 부각해 왔었던 것이며, 다만 한강변에 나라를 세워 5백년 동안 존재하였고 백제 시대의 유적으로 에워 쌓여 있는 이성산성이나 교산동 일대의 거대한 도시 구조의 발견에도 방치와 외면으로 훼손이 심화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량의 연질 토기와 붉은 기와는 삼국이 한강권에서 각축전을 가질 때가 유물이 아니라 백제가 한강권을 500년 동안 통치 할 시기로서 시대의 중복성으로 혼란을 가져올 유물이 아닌 것으로 더 이상 발굴 하지 않아도 왕도의 구조는 이미 전모가 밝혀진 것으로 이보다 더 정확한 증거는 없다는 것이 유적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연질 토기의 분포 면적이나 밀도가 한반도 그 어느 곳보다 높다는 것은 고대의 거대한 세력권이 크게 형성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한강권 다른 지역 대부분은 유물의 분포나 밀집도가 협소하고 낮은 편인데 이곳의 연질 토기편은 우리나라 그 어느 곳보다 폭 넓게 깔려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한종섭<백제문화연구 회장/ 신지식인>

 

광주신문 gjilbo20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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